남 에튀드-4

비를 피하는 개구리의 에튀드

 

비를 피하는 개구리의 에뛰드 -남&북-

1화

 

아키라 : 어쩐지 오늘은 비가 내릴 것 같네...비라고 하니...

나는 책상 서랍 안에서 개구리 모양을 한 장식물을 꺼냈다.

낡고 금이 간 보라색 개구리.

나는 조심히 개구리 장식물을 쓰다듬으며 무심코 미소를 띄웠다.

 

아키라 : 그립다... 남쪽 마법사들과 처음으로 임무를 나갔던 날이었던가.

 

살며시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개구리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다.

창문 밖에서는 빗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남쪽 마법사들과의 첫 임무가 결정되었을 때 루틸과 미틸은 목소리를 높이며 기뻐했다.

 

미틸 : 신난다! 저 열심히 해서 현자님과 모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할게요!

 

루틸 : 드디어 가는군요, 현자님. 조금 두근두근하지만 다치지 않도록 열심히 해요!

 

그런 두사람을 다정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은 레녹스였다.

레녹스는 과묵해서 언뜻 보기엔 무뚝뚝해보이지만 무척 친절하며 남을 잘 돌보는 좋은 마법사다.

 

역전의 전사라고도 불리는 그는 이제 막 현자의 마법사가 된 형제를 언제나 멀리서 지탱해주고 있었다.

 

레녹스 : 피가로 선생님과 내가 붙어있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충분히 조심하자.

 

루틸ㆍ미틸 : 네!

 

아키라 : 힘내세요, 루틸, 미틸! 저도 함께 동행하니까요!

 

미틸 : 현자님도 지켜보이겠어요! 그래서 어떤 임무인가요?

 

레녹스 : 조사야. 남쪽 국가의 황야를 여행하던 사람으로부터 기묘한 보고가 있었어.

황야 속에서 비가 그치지 않는, 사람이 없는 신기한 마을을 발견했으니 상황을 살펴봐줬으면 한다고.

 

루틸 : 비가 그치지 않는 마을...비가 그치지 않는다니 큰일이네요.

홍수나 산사태가 일어나겠어요.

 

레녹스 : 응. 어서 조사해서 손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

 

미틸 : 우리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일이군요! 기뻐라!

훌륭한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수 있을까요?

학교 친구도 제 소문을 들을까요?

 

루틸 : 소문으로 알면 쓸쓸할거야. 열심히 해서 대활약하게 되면 부끄러워 하지말고 편지를 써봐.

 

루틸 : 고향을 위해 힘냈습니다. 대활약을 할 수 있었으니 모두에게 칭찬받고 싶습니다 하고.

 

미틸 : 하지만...친구가 자랑한다고 생각해서 미워하지 않을까요?

 

루틸 : 열심히 한 일을 칭찬받고 싶은건 자랑과는 다르니까 괜찮아. 체험을 나눠갖는건 중요하니까.

 

미틸 : 알겠습니다! 친구에게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힘낼게요!

 

임무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임무가 잘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형제에 레녹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레녹스 : 임무에 나가기 전에 조사할 때 유의할 점을 알려줄게. 나중에 내 방으로 와줘.

 

미틸 : 피가로 선생님은요?

 

레녹스 : 물론 피가로 선생님도 같이...

 

그때 조용히 등 뒤에서 미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라 : 안 돼요.

 

미틸 : 왓...! 미스라씨...?!

 

미스라 : 얘기는 들었어요. 임무라니 그만둬줄래요? 귀찮거든요.

 

루틸ㆍ미틸 : 에?!

 

미스라 : 에가 아니에요. 루틸도 미틸도 약하니까 그쯤에서 어물쩡대지 말아주세요.

 

루틸과 미틸을 내려다보며 미스라는 귀찮은듯이 말했다.

횡포한 대사에는 일단 이유가 있었다.

미스라는 그들의 모친인 치렛타에게 남쪽 형제를 지키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마법사는 마력을 잃는듯 했다.

그래서 그는 두사람에 관해선 과보호였다.

 

아키라 : (과보호라고 할지, 강제적인 안전관리라고 할지...루틸과 미틸은 입을 꾹 다물고 있네...)

 

루틸 : 미스라 씨, 걱정해주시는건 정말 고맙지만...

 

미스라 : 하아, 별로 안 했어요.

 

루틸 : 저희들도 현자님의 마법사예요. 저희들도 여러분들처럼 세계를 지키... 냣...!

 

미스라에게 코를 잡힌 루틸은 놀란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이어서 미틸의 코도 잡는다.

 

미틸 : 냣...! 저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미스라 : 뭔가 말하려고 한거 알아요. 너무해, 미스라 씨 라든지. 아무튼 당신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미스라는 레녹스를 보며 흥미 없다는듯이 중얼거렸다.

 

미스라 : 피가로와 당신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죠. 적당히 정리하고 와주세요.

 

레녹스는 팔짱끼던 팔을 풀고 안경을 올렸다.

미스라에게 압박을 느끼지 않고, 그렇다고 분해하지도 않고 온화하게 반론했다.

2화

 

레녹스 : 두사람은 임무를 기대하고 있어. 나도 두사람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어. 임무에는 데려가고 싶어.

 

레녹스 : 미스라가 두사람을 안전한 장소에 남겨두고 싶어하는 이유도 알지만...

 

미스라 : 알고있다니, 당신들 얘기했어요? 내 약속에 대한걸.

 

미틸 : 얘기하면 안 됐나요?

 

미스라 : 당연하잖아요. 내가 마력을 잃어서 기뻐할 마법사가 몇 명이나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루틸 : 레노 씨는 말을 퍼뜨릴 사람이 아니에요. 거기다 레노 씨에게 비밀 같은거 만들 수 없어요. 저희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

 

미스라는 눈썹을 올리며 레녹스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양손을 들고 시선에 응답한다.

 

레녹스 : 그런거다.

 

미스라 : 네?

 

레녹스 : 에?

 

미스라 : 어떤건데요?

 

레녹스 : 어떤거냐니...입밖에 내지 않겠다는 뜻이야.

 

미스라 : 그럼 약속해주세요.

 

레녹스 : 그건 할 수 없어.

 

미스라 : 하아?

 

레녹스 :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 아마 말하지 않을거야. 두사람을 데려가도 될까?

 

미스라 : ......할 수 없네요. 그럼 저도 따라가줄게요.

 

뜻밖의 제안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녹스 : 미스라가?

 

루틸 : 미스라 씨가?

 

미틸 : 남쪽 국가의 임무에 같이 따라와 주시는 건가요?

 

미스라 :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요. 피가로나 그에게 제 운명을 맡기는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요.

 

레녹스 : ......나로서는 루틸과 미틸을 지킬 수 없다는 뜻인가?

 

미스라 : 네.

 

레녹스 : ......

 

루틸 : 미스라 씨!

 

미스라 : 그럼 출발 일정이 결정되면 알려주세요. 즉행해서 속공으로 정리할테니까.

 

미틸 : 그럼 저희들 훈련이 안 돼...윽. 정말...! 가버렸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떠나갔다.

우리는 미스라의 등을 바라보며 얼굴에 곤혹을 띄웠다.

 

아키라 : 미스라도 같이 간다니, 괜찮을까...?

 

미틸 : 저 어엿한 마법사가 되어서 좀 더 활약하고 싶었는데...

 

루틸 : 죄송해요, 레노 씨. 미스라 씨가 실례를...

 

레녹스 : 아니...

 

미안해하는 루틸에 레녹스는 안경을 올리며 미소지었다.

어딘가 그림자가 진 시선으로 혼잣말처럼 툭 내뱉는다.

 

레녹스 : ......내가 지키지 못한 사람이 있는건 사실이니까.

피가로 : 에? 미스라도 온다고?

 

아키라 : 미스라도라니...또 다른 누군가 오는건가요?

 

피가로 : 스노우 님과 화이트 님이 봉사활동을 시키기 위해 브래들리를 데려오겠다고 했어.

 

아키라 : 그래요? 여기에 오웬까지 온다면 북쪽 마법사가 모두 모이는거네요.

 

피가로 : 아하하. 설마. 그녀석은 남쪽 변두리까지 오거나 하지 않겠지. 미스라도 뭐 스노우 님과 화이트 님이 있다면 이상한 짓은 안 하겠지?

 

아키라 : 그렇다면 좋겠지만...두사람 모두 처음으로 가는 임무를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피가로 : 괜찮아, 괜찮아. 미스라는 금방 질려서 어딘가로 사라질거야.

그리고 임무 당일이 왔다.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클로에가 멋진 비옷을 만들어 주었다.

 

아키라 : (멋진 레인코트네. 이거라면 흠뻑 젖어도 괜찮겠어...)

 

레녹스 : 현자님.

 

아키라 : 아...레녹스. 모두 엘리베이터로 갔어요.

 

레녹스 : 제 양을 못보셨나요?

 

아키라 : 양?

 

레녹스 : 네...아침부터 한마리가 없어요. 무사하다면 좋겠지만 얼마전에 저녁밥이 될뻔해서 걱정돼요...

 

그 귀여운 양이 무언가 착오로 식탁에 오른다면 확실히 복잡한 기분이다.

그때 양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키라 : ...방금 양의 울음소리였죠. 저쪽에서 들렸어요. 가보죠.

 

레녹스 : 네. 죄송해요, 출발하기 전에...

 

아키라 : 아니에요!

 

우리는 양의 울음소리를 따라 안뜰로 향했다.

3화

 

안뜰에 도착하니 오웬이 양팔로 양을 안고 있었다. 식탁에 올라가버리는건가 하고 나는 반사적으로 경계했다. 그러나 어딘가 상태가 이상했다.

 

오웬 : 복슬복슬, 복슬복슬. 따뜻하네.

 

어색한 손짓으로 즐거운듯이 양의 털을 빗어주고 있다.

그 표정은 어딘가 어린아이 같았다.

 

아키라 : (이건... 혹시...)

 

레녹스 : 오웬. 그 양은 내 소중한 양이다. 돌려주지 않겠어?

 

레녹스가 말을 걸자 오웬은 놀란 얼굴을 했다.

양을 안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대로 나무 뒤에 숨었다.

 

레녹스 : 오웬...?

 

평소에는 대담무쌍한 오웬이 마음 여린 것처럼 이쪽을 엿보고 있다.

레녹스는 의아해하며 팔자 눈썹을 만들었다.

 

아키라 : (아마 재앙의 기묘한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처럼 되어있는거겠지...

레노에게 뭐라고 설명하지...오웬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에 대한 걸 알리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레녹스 : 양을 돌려주지 않겠어?

 

오웬 : ...싫어...

 

레녹스 : 심술부리지 말아줘. 너는 고기보다도 달콤한걸 좋아하잖아.

 

오웬 : 달콤한 것...

 

레녹스 : 응.

 

오웬 : 음...달콤한걸 갖고 있어?

 

레녹스 : 아니... 없는데...

 

오웬 :......

 

레녹스 : ......

 

이상한 눈싸움이 잠시동안 이어졌다.

레녹스가 먼저 이변에 눈치챈다.

 

레녹스 : ...뭔가 오웬의 상태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키라 : 아...그게...이상한걸 먹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기묘한 마법의 열매라든지...

 

레녹스 : 아...그럴지도...

 

레녹스는 안경을 올리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게 말을 걸듯이 쪼그려앉았다.

 

레녹스 : 오웬, 그 아이를 데려가고 싶은곳이 있어. 그 아이의 동료도 함께.

 

오웬은 빛이 다른 눈동자로 나무 뒤에서 가만히 레녹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녹스 : 두고 가버리는건 불쌍하잖아. 그 아이를 돌려줘.

 

오웬 : 나는...?

 

레녹스 : 에?

 

오웬 : 나는 두고 가도 돼?

 

그때 뚝 하고 작은 빗방울이 지면에 떨어졌다.

습한 공기가 바람에 흔들리고 쏴아 하고 부드러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은색 하늘은 조용하고 어둑어둑하다.

레녹스는 조금 생각하더니 오웬에게 제안했다.

 

레녹스 : 네가 가고 싶다면 데려가줄게. 어차피 미스라 네도 함께니까. 어떻게 하고 싶어?

 

오웬 : ......

 

아키라 : 괜찮나요, 레녹스...

 

레녹스 : 안 될지도 모르지만...쌍둥이 선생님도 피가로 선생님도 있으니까.

내버려 두고 간다는게 슬프다는건 알아요.

 

나는 레녹스를 바라보았다. 오웬에게서 시선을 떼지않고 그는 입을 연다.

뚝 하고 떨어진 목소리는 빗소리와 같았다.

 

레녹스 :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게 되지요.

 

부드러운 비에 젖어도 춥지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다만 지면의 색이 느리게 변해간다.

오웬은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뒷머리가 끌리는듯한 걸음걸이로 양을 안고 나무 뒤에서 나왔다.

오웬은 조용히 레녹스에게 양을 건넸다.

레녹스는 양을 받아들며 웃었다.

 

레녹스 : 고마워.

 

오웬 : ......

 

갑자기 오웬은 몸을 홱 돌렸다. 도망치듯이 달려가는 등에 레녹스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레녹스 : 같이 안 가는 건가.

 

오웬 : 안 가.

 

그 목소리는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장난감을 포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비웃는 듯한 냉소의 울림 같기도 했다.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고 날카롭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변덕인지 원래대로 돌아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오웬에게서 돌아온 양은 레녹스에게 안겨서 기쁜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있었다.

 

레녹스 : 루틸 같네요.

 

아키라 : 양이...?

 

레녹스 : 오웬 말이에요. 어린시절에 제 안경을 무서워해서...저런식으로 경계했었어요.

 

레녹스가 양을 안은 손은 마치 아이를 안고있는 것 같았다.

나는 레녹스와 남쪽 형제들 사이에 있는 수많은 소중한 추억을 느꼈다.

전날 그가 미스라에게 했던 말을 머리 한쪽에 스치면서.

 

"나로서는 루틸과 미틸을 지킬 수 없다는 뜻인가?"

 

오웬이 사라진 안뜰을 바라보면서 레녹스는 혼자 중얼거렸다.

 

레녹스 : ...비에 젖지 않으면 좋겠는데.

4화

 

스노우 : 오오, 왔다왔다. 현자, 레녹스여.

 

화이트 : 레녹스가 지각하다니 별일이구먼. 무슨 일이 있었는가?

 

레녹스 : 양을 잃어버려서요... 죄송합니다.

 

루틸 : 무사히 찾으셨나요?

 

레녹스 : 응.

 

미틸 : 다행이다!

 

브래들리 : 잘 간수하고 있어. 어물쩡거리면 먹어버릴테니까.

 

미스라 : 네. 양은 음식이니까요.

 

미틸 : 레노 씨의 양은 음식이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앞은 떠들썩했다. 자주적으로 참가했기 때문인지 미스라도 브래들리도 얌전하다.

 

피가로 : 그럼 출발할까. 우선 남쪽 탑까지 가서 아무것도 없는 황야 위를 여럿이서 장장 날아갈건데.

 

레녹스 : 그렇게 따분한듯이 말하지 않아도 될텐데.

 

피가로 : 일부러 그랬어.

 

미스라가 귀찮은듯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손바닥을 들었다.

 

미스라 : 제가 공간을 연결할게요.

 

스노우, 화이트 : 와아~!

 

미스라 : 아르시무

 

미스라가 주문을 외우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 문이 나타났다.

루틸이 감격한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루틸 : 이거 중앙의 사건 때 저도 지나갔었어요. 순식간에 다른 장소로 바뀌었어요.

 

루틸 : 정말 깜짝 놀랐어요. 굉장하네요, 미스라 씨.

 

미스라 : 하아, 빨리 가세요.

 

루틸 : 정말, 칭찬했는데!

 

눈썹을 치켜올린 루틸도 귀찮은듯이 돌보고 있는 미스라도 어쩐지 즐거운 분위기였다.

 

브래들리 : 편리하지. 빗자루 타고 먼 여행 하는 것도 싫지 않지만 말야. 뭐 쪼그만 것에게는 무리인가.

 

미틸 : 으...저를 말한건가요? 저도 먼 여행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한 적은 없지만...

 

브래들리는 히죽 웃으면서 미틸의 작은 등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브래들리 : 그럼 다음에 피가로한테 데려가달라고 해. 너는 하늘을 나는 법도 나쁘지 않으니까.

 

미틸 : 정말요?!

 

브래들리 : 어. ...윽, 잡아당기지마!

 

미틸 :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그 얘기에 대해서...

 

브래들리 : 기분이 좋으니까 저를 칭찬해주세요, 겠지. 이런 때는 솔직한게 성가시지 않지.

 

미틸 : 아, 아니에요! 저는 마법을 공부하는 중이고, 그러니까...

 

브래들리 : 알겠어 알겠어. 간다, 자.

 

미틸의 목덜미를 잡고 브래들리가 문 너머로 데려간다. 그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피가로가 쓴웃음을 섞은채 레녹스를 재촉한다.

 

피가로 : 떠들썩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네. 그럼 갈까, 레노.

 

레녹스 : 네.

 

그들은 조용히 문을 빠져나갔다. 루틸과 미틸과는 언제나 함께 있는 탓에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젊은 마법사들이 없을 때는 피가로도 레녹스도 차분한 것이다.

 

아키라 : (...쓸쓸해 보이는건...나 혼자만의 생각인가...)

 

비오는날에 외출할 때처럼 가슴속에 축축한 우울함이 내린다. 결코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무조건 맑은 날이 아니면 싫다는 둥 떼를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다는걸 알고있다.

그때 쌍둥이가 내 손을 잡는다.

 

스노우 : 자, 출발하자! 내 손을 잡는게야, 현자여!

 

화이트 : 내 손도 잡으렴! 함께 가는게야!

 

아키라 : 네, 네...

 

미스라 : 빨리 하세요.

 

미스라가 졸려보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물웅덩이를 뛰어넘듯이 나는 크게 다리를 벌리고 공간의 문을 빠져나갔다.

도착한 남쪽 국가의 황야에는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에 섞여 물소리가 들린다. 햇살에 눈을 가리며 브래들리가 비스듬히 앞을 가리켰다.

 

브래들리 : 저기 아니야? 오아시스 같은 녹색이 보이지.

 

미틸 : 정말이다! 하지만 하늘은 맑아요. 먹구름 같은건 안 보여요.

 

브래들리 : 재밌겠다. 별난 보석이 잠들어 있을지도 몰라. 가서 조사해볼까.

 

미틸 : 잠깐 기다리세요! 이건 남쪽 국가의 일이에요! 제일 먼저 조사하는건 제가...

 

브래들리 : 시끄러워. 빠른 사람이 이기는 거야.

 

미틸 : 치사해요...!

 

성큼성큼 큰 발걸음으로 나아가는 브래들리에 미틸은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려한다.

 

피가로 : 이런이런. 괜찮으려나.

 

레녹스 : 브래들리는 돌보는걸 잘하니까 괜찮을 거예요.

 

미스라 : 믿을 수 없어요. 따라가죠, 자, 가요.

 

루틸 : 잠깐, 잡아당기지 마세요! 미스라 씨. 저희에게는 저희의 페이스가...

 

미스라 : 하아, 몰라요.

 

루틸 : 정말-!

 

미스라는 루틸을 껴안듯이 해서, 빗자루도 쓰지 않고 하늘을 날았다.

미틸이 있는 곳으로 쫓아갔다.

 

레녹스 : 괜찮을까요...

 

피가로 : 괜찮아. 미스라는 마력을 잃고 싶지 않은거야. 완벽하게 형제를 지키겠지.

 

피가로 : 오즈에 버금가는 마력을 가진 자가 저 아이들의 수호자를 해주고 있어. 우리들도 면직이네.

 

피가로의 말에 나는 놀랐다. 포기한것인지 자학하는건지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을 다문채 레녹스의 등을 툭 치고 걷기 시작한다.

 

피가로 : 마음 편하게 가자.

 

레녹스 : ...피가로 선생님은 단념하는게 빠르네요.

5화

 

피가로 : 단념해? 뭘? 무엇도 단념하지 않아. 전환이 빠르다고 말해줄래?

 

레녹스 : 그럼, 전환이.

 

피가로 : 집착해봤자 보람이 없어. 전부 빗방울 같은 거야. 머무르지 않고 형태를 바꿔서 어딘가로 사라져.

 

피가로 : 잠깐이라도 손바닥에 닿으면 애착도 끓어오르고 감회도 깊어지지만 그때뿐인 이야기야. 단지 그것뿐이야.

 

레녹스는 볼을 당기며 웃었다.  

비꼬는듯한 웃음 같기도 하고 다정한 쓴웃음 같기도 해서 나는 곤혹스러웠다.

수백년을 살고있는 마법사의 표정은 지금 와서도 잘 모르겠다.

 

레녹스 : 저는 집념이 강한 타입이라서요.

 

피가로 : 아아, 그랬지.

 

레녹스 : 당신이 부럽네요.

 

피가로 : ......

 

피가로는 칭찬에 느릿느릿 눈을 가늘게 떴다. 뼛속까지 차가워지는듯한 시선은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어 두려웠다.

하지만 끈질긴 권유를 꺼려하는듯 가볍게 느껴졌다.

레녹스는 어깨를 움츠리고 숨을 토해냈다.

 

레녹스 : 걱정되니 상황을 보고 올게요. 제가 나설 자리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두사람 모두 의욕이 넘쳐서요.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피가로 : 그렇네.

 

피가로는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레녹스도 두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레녹스의 뒤를 따랐다.

 

아키라 : 레녹스. 저도 같이 가요. 저...한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레녹스 : 현자님...네, 물어보세요.

 

아키라 : 방금 그건...싸운건가요?

 

레녹스는 곤란한듯 눈썹을 기울였다.

 

레녹스 : 싸움같은건 하지 않아요. 피가로 선생님은 위대한 마법사이시고 저는 일개 평범한 마법사니까요...

 

아키라 : 아...그런가요? 그럼 다행이에요...

 

레녹스 : ...... 피가로 선생님은 단념하는게 빠른 면이 있어서...아, 전환인가. 손을 놓쳐버리기 전에 손을 놓아버리고 말아요. 파우스트 님 때도 아마 그럴거예요.

 

아키라 : 파우스트...?

 

레녹스 : 전선을 이탈한 계기에 대한 이야기예요. 제자로 삼아서 예뻐하고 뜻을 이루어주려고 했더니...

파우스트 님이 알렉, 알렉 하면서 알렉 님과 혁명에 몰두해서 어쩐지 흥이 깨져버렸다고...

 

아키라 : ......그거, 파우스트는...

 

레녹스 : 모릅니다. 저도 재회하고 처음 들었어요. 그게 뭐냐고 처음엔 화가 났지만...

 

레녹스 : 피가로님을 알아가는 동안 서투른 농담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레녹스 : 하지만 더 알아가다보니 숨기고 있던 본심의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오아시스를 닮은 녹색이 가까워지자 쏴아 하는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레녹스는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녹스 : 진위는 모릅니다. ...그렇게 예뻐하던 두 사람도 빗방울 정도라니.

 

레녹스 : 허세이기도 하고 본심이기도 하며, 지나치게 오래 살아온 마법사가 본 세계는 왠지 모래 위에 그려진 소리 없는 그림 같아요.

 

레녹스 : 보람이 없다, 라... 사는 보람만은 어쩔 수가 없네요. 잃는다면 계속 버려진채로 있을테니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목덜미를 긁적이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도 충분히 오래 산 마법사다웠기 때문에.

 

황야의 맑은 하늘 아래. 알 수 없는 빗소리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아키라 : 와아...! 뭐지, 여기는...?!

 

오아시스에서 보인 곳은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공간이었다.

물방울 모양을 한 거대한 나무에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색은 보라색과 하늘색, 분홍색을 띠고 있다.

 

운치 있는 물방앗간과 다리와 연못이 있어 마치 컬러풀한 정원 같았다.

나는 떨어져내린 분홍색 물방울을 핥았다.

 

아키라 : 특별한 맛은 안 나네요...

 

레녹스 : ...핥은건가요.

 

아키라 : 아, 안 됐었나요?

 

레녹스 : 독이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피가로 선생님이 계시니 괜찮겠지만요.

 

브래들리 : 여, 현자. 레녹스.

 

브래들리의 목소리가 들려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마도구인 장총을 꺼내서 물방울 나무를 아래서부터 찔렀다.

 

물방울 나무가 탄력있게 흔들리고 전체적으로 진동이 일어나자 쏴아아 하고 큰비가 내렸다.

 

아키라 : 와앗... 젖었다... 뭔가요, 이 나무? 비의 나무...?

 

브래들리 : 글쎄. 마도구나 무언가가 한 짓은 아닌거 같은데.

 

빗방울에 렌즈가 흐려지면서도 레녹스는 물방울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레녹스 : ...어디선가 본듯한 기분이 들어요...

 

브래들리 : 정말이냐. 그러고보니 너. 세계를 방랑했다고 했었지.

 

레녹스 : 루틸과 미틸은?

 

브래들리 : 미스라가 데리고 갔어. 두사람은 보호하고 있을테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조사하라고 말야.

 

아키라 : 보호라니...

 

브래들리 : 잘모르겠지만. ...응?

 

문득 브래들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신비한 정원 저편에 우리가 걸어온 황야를 응시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장총을 꺼내 한쪽 눈을 감으며

조준을 맞췄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한다.

 

아키라 : 왜 그러세요?

 

브래들리 : 와봐, 현자. 총의 여기를 잘 봐.

 

브래들리가 말한대로 나는 장총을 겨눴다. 총대에 있는 조준에 시선을 맞춘다.

그렇게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 나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알아챘다.

 

아키라 : 앗...

 

레녹스 : 현자님, 왜 그러세요?

 

아키라 : 황야의 풍경이 조금씩 벗어나고 있어요.....이 정원 움직이고 있어요...

 

레녹스 : 움직이고 있어...?

...혹시...클로로스(クローロス)의 여행하는 샘터?

6화

 

미틸 : 미스라 씨! 발목에 휘감긴 이 덩굴 좀 풀어주세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잖아요!

 

미스라 : 하아...어디에도 갈 수 없게 한 거예요. 낮잠 잘테니 얌전히 있어주세요.

 

루틸 : 미스라 씨, 잠들지 못하시잖아요.

 

미스라 : 시끄럽네요.

 

루틸 : 미스라 씨. 저희를 걱정해주시는건 기쁘지만 이건 연금...

 

미틸 : 어차피 걱정 같은건 하지 않는거예요! 미스라 씨는 자기 마력이 중요할 뿐이잖아요!

 

미스라 : 그 말대로예요.

 

미틸 : ...윽, 거봐요, 역시! 어머님의 아는 사이라고 했지만 결국은 북쪽 마법사라고요!

 

미틸 : 우리들 같은건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어찌되든 상관없는거예요.

형님, 이런 사람과 사이 좋게 지내면 안 돼요!

 

루틸 : ......

 

미스라 : 화내는 의미를 모르겠네요. 나와 치렛타가 약속한건 저에게 있어서는 불행이지만 당신들에게는 행운이에요.

 

미틸 : 네?!

 

미스라 : 어디선가 객사할지도 모르는 약한 마법사인데 저에게 보호받을 수 있는 거예요.

손에 넣을 수 없었던 힘을 손에 넣었어요. 기뻐하면 되잖아요.

 

미틸 : 그런거 바라지도 않는데...윽.

 

루틸 : ...미스라 씨에게 있어서 어머님과 약속한 건 불행인가요?

 

미스라 : ...... 그래요.

 

루틸 : ...... 알겠어요. 그럼 이런 거 그만두죠.

자, 미스라 씨. 덩굴을 풀어줘요.

 

미스라 : 그러니까 몇 번이나 말하는데...

 

루틸 : 저도 몇 번이나 말했어요. 약하다고 해도 자신답게 살고 싶고 자유가 없으면 괴로워요.

 

루틸 : 미스라 씨를 불행하게 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아요.

어서 덩굴을 풀어요. 풀지 않으면...

 

미스라 : ...풀지 않으면 뭡니까?

 

루틸 : 혀를 깨물어서 죽을 거예요.

 

미스라 : 잠...!!

 

루틸 : ......읏!

 

미스라 : 바...바보바보바보...!! 무슨 생각을 하는거예요...?!

 

미틸 : 형님, 혀를 깨물어버렸어...! 형님이 죽겠어요...! 미스라 씨, 빨리 덩굴을 풀어요...!

 

미스라 : ......읏. 아르시무!

 

미틸 : 형님...!

 

미스라 : 빨리 입을 벌려요...! 이..., 이렇게 죽으면 제가 지키지 못한게 되는 건가요?

 

미틸 : 그런거 몰라요! 미스라 씨는 바보!! 바보!! 최악이에요...!!

 

미스라 : 루티...

 

루틸 : 신난다! 자유다!

 

미스라 : ......

 

미틸 : 형님! 다행이다...! 와아아앙.

 

미스라 : ...속인거군요...혀 깨물지 않은거죠...

 

루틸 : 다음엔 정말로 깨물 거예요. 미스라 씨가 저희를 물건 취급하면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거예요.

 

미스라 : 의미를 모르겠네요... 그도 그럴게 자유롭게 되고 싶은 거잖아요? 돌이 되면 자유는 없을텐데요.

 

루틸 : 돌이 될 자유가 있어요. 당신에게 구속당하고 관리당해서 자유를 잃게 되면 돌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미스라 : ......전혀 모르겠어요...

 

루틸 : 알 거예요. 미스라 씨가 저희를 관리하고 싶어하는건 미스라 씨도 부자유한 것이 싫기 때문이죠?

 

루틸 :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힘이 사라지는 일이 생긴다면 무섭고 싫을 거예요. 이해해요.

 

미스라 : ......

 

루틸 : 그래도...그런 부자유를 불행이 아니라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고 싶어요.

 

루틸 : 모처럼 어머님을 통해 만났고, 이어진 인연이 있으니까요.

불편하고 무서워도 당신의 행복이 되고 싶어요.

 

미스라 : ......아니, 당신들이 가만히 있어주면 행복한데요...

 

루틸 : 정말, 서로 양보해요. 아까처럼 묶어둔다면 혀를 깨물 거예요.

하지만 미스라 씨가 안심할 수 있도록...

 

루틸 : 당신에게 어디로 가는지 보고하고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마음에 새겨두는건 할 수 있어요.

저희를 신뢰해 줄 수 없나요?

 

미스라 : ......생각해볼게요... ......하아...깜짝 놀랐다......

 

미틸 : 저도 깜짝 놀랐어요...

 

루틸 : 놀라게 해서 미안해, 미틸. ...어라?

 

미틸 : 왜 그러세요?

 

루틸 : 저쪽에 뭔가 글씨가 쓰여진 판이 있어. 간판인가? 표찰...?

 

미틸 : 뭐지...가서 알아봐요!

 

루틸 : 응!

 

미스라 : 잠깐만요...! 신중한 행동은 어떻게 된 거예요?!

...정말이지, 이런거...제정신이 아니라 어떻게든 되어버릴 것 같아요.

 

미스라 : 금방이라도 비에 휩쓸려버릴, 모래 위 그림 같은 것이 내 생명선을 쥐고 있다니...

......뭘 남겨두고 간 거예요, 치렛타...

루틸 : 뭘까, 이게. 낡아서 글씨가 희미해져있는데...

귀여운 색을 띠고 있네.

 

미틸 : 간판일까요...? 앗...먼지를 털었더니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콜록콜록...

 

루틸 : 콜록...뭐지뭐지? 요, 용감... ...클로로...

 

미틸 : [용감하고 아름다운 나의 친구 클로로스의 집]...?

7화

 

스노우ㆍ화이트 : 꺅꺅, 비가 온다!

 

스노우 : 찰박찰박! 우리는 비오는걸 정말 좋아한단다!

 

화이트 : 참방참방! 피가로도 같이 물놀이 하자꾸나!

 

피가로 : 사양할게요. 두분은 천진난만해서 좋네요.

 

스노우 : 호호호, 우리는 어린이니까 말야.

 

화이트 : 피가로는 너무 영리한게야. 요령좋고 주의깊고 형편좋고 마음에 든 무언가에 바싹 달라붙어 있어.

 

화이트 : 애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영리하게, 길게, 정처없이 살아온 탓에 단념이 빠르게 되었구먼.

 

화이트 : 달콤한 과육만 입에 넣고 급하게 열매의 씨를 뱉어버리듯이 손을 놓고, 떠나가고, 이동하지.

 

피가로 : 너무하네요, 화이트 님. 그렇지 않아요.

 

스노우 : 그렇지 않을게야. 분별이 지나치게 빠른건 옛날부터였지. 오즈도 만나자마자 돌로 만들겠다고 말했어.

 

피가로 : 말했지. 말했습니다...

 

화이트 : 미틸의 예언을 알려줬을 때도 치렛타에게 낳지 말라고 해서 뚜껑 열리게 만들었지.

 

피가로 : 말했죠. 말했어요...

 

스노우 : 오즈가 아서에게 집착하고 있을때도 오즈의 약점이 되지 않도록 어서 돌로 만들어두자고 했지.

 

피가로 : 말했어요. 말했어요...

 

화이트 : 그 때문에 막상 정이 들어도 자기 마음을 좀처럼 신용할 수 없는게야. 사실은 외로움쟁이인 상냥한 아이인데 말이지.

 

스노우 : 단순히 사치에 길들여진 어리석은 놈이야.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도 사랑받고 기대받아서 사랑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버린게지.

 

피가로 : ...... 아하하... 그건 스노우 님이잖아요.

 

스노우 : 뭐가 말인가?

피가로 : 사랑의 가치를 모르게 되어 가장 사랑하는 한 쌍마저 그 손을 써서 돌로 만들지 않았나요.

 

피가로 : 스스로도 어리석다고 생각하죠? 저로서는 뭐, 이쪽에 어서오십시오 하는 느낌인데.

 

피가로 : 그래서 고독의 맛은 어때요? 즐기고 있나요? 올바르게 맛보는 법을 알려드릴까요?

 

스노우 : ...... 피가로야.

 

화이트 : 그만두게, 스노우! 피가로도 기세에 떠밀려 부추기지 말거라. 거기다 스노우는 고독하지 않아.

 

피가로 : 고독해요. 당신은 이제 없으니까.

 

화이트 : ......

 

스노우 : 피가로야. 슬슬 벌 받아야겠구나. 그대는 벌 받는걸 아주 좋아하니까 말이네.

 

피가로 : ...... 한번 해보지 그래. 깨진 조각을 잃은 늙은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마.

 

화이트 : 아아, 아아, 마음대로 해라! 어느쪽이 돌이 되든 나와 동행자겠구먼. ...응?

 

피가로 : ...읏, 우왓...! 뭐야, 이게?!

 

스노우 : 왓...! 벌레...?!

 

화이트 : 벌레 대군이구먼! 저 작은 상자에서...

 

피가로 : ...뭔가 글씨가 쓰여있어...이건...

[클로로스의 소중한 음식]...?

루틸 : 현자님! 레노 씨, 브래들리 씨!

 

아키라 : 루틸, 미틸! 미스라도 무사했군요.

 

미틸 : 현자님, 저희가 묘한 간판을 발견했어요.

[용감하고 아름다운 나의 친구 클로로스의 집]이라는.

 

아키라 : 클로로스...

 

스노우 : 그쪽도인가. 우리들도 묘한 상자를 발견했단다.

 

화이트 : [클로로스의 소중한 음식]이라고 써있어. 안에 들은건 작은 벌레였지만.

 

피가로 : 작은 상자 바닥에서 달콤한 꿀이 나와서 벌레가 꼬인 것 같아.

 

레녹스 : 피가로 선생님...

 

미틸 : 여기, 학교에서 배운 개구리의 사육상자와 닮았어요. 예쁜 물이 있고 비가 내리고...

 

브래들리 : 개구리? 개구리 같은건 한마리도 못봤어.

 

레녹스 : 클로로스가 개구리야. 여긴 클로로스를 찾기 위한 물의 정원이야.

 

미스라 : 뭔가 알고 있나요?

 

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신비한 비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레녹스 : 이 정원을 만든건 콜린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예요.

콜린은 사람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있을 때 만났어요.

그도 찾고 있던게 있었어요. 그게...

 

루틸 : ...개구리 클로로스?

 

레녹스 : 그래.

 

그치지 않는 빗소리를 들으며 레녹스는 그리운듯한 눈으로 우리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8화

 

레녹스 : ...고마워. 물을 나눠줘서 살았어.

 

콜린 : 천만에. 나도 여행을 하는 한 사람으로서 외로웠어. 천천히 있다가 가, 레녹스.

나는 콜린. 서쪽 국가의 마법사야. 이곳은 내 친구를 위한 정원이야.

 

레녹스 : 친구...?

 

콜린 : 클로로스라고 해. 보라색을 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개구리야. 이름도 내가 지어줬어.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걸렸던 날, 물 웅덩이 위에서 딱 마주쳤어.

 

콜린 : 거울처럼 하늘을 비춘 물 웅덩이 위에 있던 클로로스는 하늘에 날리는 보라색 꽃 같았어. 홀쭉한 손발과 신비로운 피부에 홀딱 반했지.

 

콜린 : 젖은듯한 눈동자를 본 순간 나는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어. 어떻게 해서든 친구가 되고 싶었어.

그는 고상하고 사랑스럽고 날렵하고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얼마 안 가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었어.

 

콜린 : 우리들은 달밤에 춤을 추고 물가를 산책하거나 벌레를 잡으며 놀곤 했어. 그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했어.

 

콜린 : 그의 친구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워서 함께 있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

 

콜린 : 그런 기분...너에게도 제대로 전해지면 좋을텐데. 너에게도 그런 소중한 사람이 있어?

 

레녹스 : ......

 

레녹스 : 응. 지금은 떨어져있지만, 있어.

 

콜린 :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만큼 곁에 있어주는게 좋아. 나와 클로로스처럼 되기 전에.

 

레녹스 : ...무슨 뜻이야?

 

콜린 : 클로로스는 철새에게 잡혀가고 말았어.

그후로 쭉 그를 찾고 있어. 그것을 위해 클로로스가 좋아할만한 정원을 마도구로 만들어서 여행을 하고 있는거야.

 

레녹스 : ...... 쭉... 언제부터?

 

콜린 : 백 년쯤 전일까.

 

레녹스 : ...... 클로로스는 마법의 생물...마법의 개구리인가?

 

콜린 : 평범한 개구리야. 나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특별한 세상에 하나뿐인 개구리지만 말야.

 

레녹스 : ......

레녹스 : 웃는 얼굴로 말하는 콜린 앞에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어요.

백 년 이상도 전에 철새에게 잡혀버린 개구리...

이미 죽어있을거라고는.

 

레녹스 : ...저도 절대로, 결코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슬픈 이별을 한 채, 그 분은 이제...살아있지 않겠지, 라고는...

 

아키라 : ...레녹스...

 

레녹스 : 하지만... 얼굴에 드러났던걸까요. 콜린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콜린 : 그런 얼굴 하지마, 레녹스. 클로로스는 무사히 있어. 나는 확신하고 있어.

 

레녹스 : ...어떻게...

 

콜린 : 왜냐하면 나는 마법사로 태어났지만 자신을 위해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런 내가 마음으로 바라고 있어. 부디, 무사히 있어줘.

신이시여, 부디, 그를 만나게 해줘. 라고.

 

콜린 : 생애 단 하나뿐인 소원이야! 그러니까 반드시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해. ...그치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콜린 : 두 번 다시 클로로스를 만나지 못한다면...

...읏, 나는...... 난 어떡하면 좋지?

 

레녹스 : ......

 

콜린 : ......어떻게 살아가면 좋지? 그게...그게...

어떻게 해서든 만나고 싶어. 그런 이별은 하기 싫어...

...읏, 클로로스, 보고싶어...

 

콜린 : ......보고싶어......

레녹스 : ......그가 우는 걸 본것은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다음날 아침, 웃는얼굴로 저를 배웅해줬어요.

다음에 만날 때는 클로로스를 소개하겠다면서요.

 

루틸 : ......콜린 씨......

 

브래들리 : ...... ...이 정원에서 다른 마법사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아. 아마도 콜린이라는 녀석은 돌이 되어버렸을거야.

 

브래들리 : 정원을 만든 마도구만이 남아, <거대한 재앙>의 영향으로 되살아난걸지도 모르지...

 

레녹스 : ......

 

미스라 : 그럼 마도구를 처리하고 이곳을 부순다음 돌아가죠. 그것으로 한 건 해결이에요.

 

레녹스 : ......그렇지.

 

괴로운 침묵에 쓸쓸함이 감돌았다. 남쪽 형제도, 쌍둥이도, 피가로도 침울해 있었다.

정원에 내리는 빗소리도 누군가 떨어뜨린 눈물처럼 슬픈 기색이 느껴진다.

 

보라색 개구리도, 그의 친구였던 서쪽 마법사도,

이곳에는 없다.

 

그때 브래들리가 마도구인 장총을 어딘가로 사라지게 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브래들리 : 돌아가는걸 서두를 것도 없지. 그녀석들은 달밤에 춤을 췄잖아.

 

브래들리 : 밤을 기다려 한바탕 떠들고 그녀석에게 조의를 표하자.

9화

 

그건 멋진 제안이었다.

하지만 모두 그 제안이 브래들리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띄웠다.

 

미틸 : 브래들리 씨가 그런 말을 하다니...

 

브래들리 : 뭐야, 잘못됐냐.

 

브래들리는 쑥스러운듯이 찡그린 후에 조용한 눈길로 미틸에게 웃음을 지었다.

 

브래들리 : 죽은 자는 존경받아야 하는 법이야. 이런 엉터리 세계에서 돌이 되는 것까지 적당히 한다면...

살아있는 것조차 적당히 하게 되지.

 

피가로 : ......

 

브래들리 : 얼빠진 바보가 있었으니 얼빠진 풍경을 볼 수 있었어.

그녀석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얼빠진 바보가 되어 춤추자.

 

빙긋 웃는 브래들리에 루틸이 기세 좋게 손을 들었다.

쭉 뻗은 손끝이 빗방울을 튕기며 반짝반짝 빛난다.

 

루틸 : 찬성이에요!

 

미틸 : 저도 찬성이에요!

 

화이트 : 나도 찬성이네!

 

스노우 : 클로로스처럼 물 웅덩이를 뛰며 달빛의 연못에서 춤추는게야!

 

피가로 : 아하하. 좋은데. 모처럼이니 좀 더 정원을 즐기자.

즐거운 이별을 하는거야.

 

미스라는 말없이 귀를 긁고있다.

모두의 시선을 받고 항복한듯이 한숨을 쉰다.

 

미스라 : 알겠습니다. 좋아요.

 

이렇게 해서 우리는 클로로스의 정원에서 밤을 기다리기로 했다.

미스라 : ......

 

미틸 : 미스라 씨...잠깐 이야기 해도 될까요?

 

미스라 : ...하아, 뭔데요.

 

미틸 : 저기...어머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머님과 친구셨죠?

저는 어머님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괜찮다면 알려주실 수 없나요?

 

미스라 : ...어땠냐니...치렛타는 강한 마녀였어요. 웃고있을 때가 많았죠.

 

미틸 : 그런가요? 잘 웃는 사람이었다는건 행복하게 지냈던건가요?

 

미스라 : 글쎄요...인간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면 행복했던거겠죠.

 

미틸 : ...... 제가 싫으신가요?

 

미스라 : 어째서요.

 

미틸 : ......저를 낳고 어머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미스라 : 이상한 말을 하네요. 그 여자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을 뿐이에요.

몇 가지 이별을 천칭에 걸고 당신을 낳는걸 선택했어요.

저는 뭐, 선택받지 못했을 뿐이에요.

 

미틸 : ......

 

미스라 : 뭐라고 할까...당신은 그녀의 선택지인 것 같아요.

 

미틸 : ...에헤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기뻐요.

어머님이 안 계셔서 쓸쓸하지만... 이렇게 어머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형님도 계시고...

미틸 : 미스라 씨가 어머님과 함께 있었던 것처럼 피가로 선생님이나 레노 씨가 있어주니까 쓸쓸하지 않아요.

 

미스라 : 그런가요.

 

미틸 : 네. 언제나 지켜봐주셨어요. 저희들을 지켜주셨어요.

 

미스라 : ......

 

미틸 : 미스라 씨...... 어디에 가시나요?

 

미스라 : 애보기는 질렸어요. 그러니까 서로 양보를 하고 올게요.

미스라 : 레녹스.

 

레녹스 : ......미스라...미틸은? 너를 만나러 갔었잖아.

미스라 : 이야기를 나눴어요. 다음은 당신과 피가로에게 맡길게요.

 

레녹스 : ......

 

미스라 : 죽게 하지 말아주세요. 루틸도, 미틸도.

 

레녹스 : ......물론이야.

루틸 : 멋진 정원이네요. 없어진다는게 아쉬워요.

 

아키라 : 그렇네요...

 

나는 루틸, 브래들리와 함께 연못가를 걸었다.

빗소리가 그치지 않는 정원.

그러나 오늘 밤, 길었던 비가 끝난다.

 

쓸쓸함이 느껴졌지만 정원을 바라보면

흔해빠진 웃음이 기적처럼 넘쳐흘렀다.

 

레녹스의 옆에서 미스라가 미소짓고 있다.

그의 안경을 벗겼다가 씌웠다가 하면서 즐거워보인다.

물 웅덩이를 뛰며 미틸이 피가로에게 달려간다.

무언가를 발견해서 자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랑하는 미틸보다도 기뻐보이는 피가로가 이야기를 듣고있다.

 

상냥한 빗소리에 둘러싸여 쌍둥이는 서로 손을 잡고 춤을 춘다.

호흡이 딱 맞게. 마음을 합쳐서.

 

브래들리 : 좋은 곳이었어.

 

루틸 : 정말이에요... 정말 멋진 곳이에요.

 

입술을 깨무듯이 미소 지으며 루틸이 몰래 눈물을 머금는다.

브래들리는 그 눈물을 발견하고 놀리며 웃었다.

루틸도 울고웃으며 때리는 시늉을 한다.

 

나도 가슴에 복받치는 것이 있었다.

비에 휩쓸리듯이 잃어가는 것.

잃어버린 것들.

 

잃었다는걸 알고 나서야 사랑할 수 있게 되는걸까.

잃었다는걸 알고 있어도 사랑해 나갈 수 있는걸까.

 

피가로 : 현자님!

 

피가로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를 가리키며 피가로가 웃는다.

 

피가로 : 이제 곧 밤이 올 거야.

 

그 목소리를 신호로 브래들리가 나와 루틸을 양옆으로 껴안았다.

 

브래들리 : 좋아! 신나게 가자!

 

아키라 : 에?

 

루틸 : 왓...!

 

브래들리는 기세 좋게 연못에 뛰어들었다.

10화

 

아키라 : ....아하하...! 흠뻑 젖었다...!

루틸 : 아하하! 깜짝 놀랐다!

 

드높이 물보라가 튀고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가느다란 실 같은 비도, 연못의 수면도,

물보라도, 달빛에 빛났다.

 

미틸 : 정말, 뭐하는거예요!

 

스노우 : 물장난이구나!

 

화이트 : 즐거워보이는구나!

 

기묘한 상처로 인해 그림 속에 갇힌 쌍둥이가 즐겁게 목소리를 높이며 그림에서 날아간다.

 

출항하는 배에 던져진 종이 테이프처럼 그림에서 길게 뻗은 자신들의 그림자를 끌고 여행하는 물의 정원에서 스텝을 밟는다.

 

루틸과 브래들리도 수면을 걷어차 서로 물보라를 뿌리며 함께 춤춘다.

거기에 레녹스가 내보낸 양들이 섞였다.

즐거운듯이 물가를 달려간다.

 

피가로가 우아하게 인사하며 스노우에게 댄스를 청한다.

화이트는 미틸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미스라는 혼자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키라 : 아하하! 간지러워!

 

레녹스의 양이 매달리는 바람에 나는 웃음소리를 냈다.

 

레녹스 : ......

 

정신을 차리니 레녹스가 옆에 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도 당연한 듯이 그의 손을 잡았다.

 

축축한 채로 스텝을 밟는다.

웃는얼굴로 서로 바라보면서.

 

레녹스 : 좋은 밤이네요.

 

아키라 : 좋은 밤이네요!

 

마법사 콜린과 개구리 클로로스를 떠올리며 우리들은 달밤에 계속 춤을 췄다.

 

아키라 : 맞다, 레녹스. 한가지 부탁해도 될까요?

 

레녹스 : 물론이죠. 무엇이든지요, 현자님.

 

아키라 : 피가로와 화해해주세요. 싸운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조금 걱정이 됐으니까.

 

레녹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로 피가로를 찾아 손짓했다.

피가로도 곧바로 물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정말로 싸운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밝은 눈으로 피가로는 웃고있다.

 

피가로 : 왜?

 

레녹스 : 현자님께서 저희가 화해하는게 보고 싶은가봐요.

 

피가로 : 아하하! 뭐야 그게. 싸움 같은거 안 했어. 혹시 아까 그거?

그 정도 [아~~]는 매일 있는 일이야. 이런 일을 신경쓰면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어떤 나라에서도 살아갈 수 없어.

 

피가로의 타이르는 듯한 어조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라 : 저도 원래 세계에서는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 세계에서는 소중하게 하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피가로.

 

아키라 : 이 정원에 내리는 비처럼 모르는 사이에 쌓여서 홍수를 일으킬지도 모르니까요.

 

피가로는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어딘가 쓸쓸한 듯이, 정원에 미소를 짓는다.

 

피가로 : ...그러네. 무언가의 끝도, 무언가의 시작도 그런 것일지도 몰라. 고마워, 현자님. 네 충고에 따를게.

 

피가로 : 레녹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까 조금 화가 났었어.

 

레녹스에게 오른손을 내밀며 피가로는 미소지었다.

그의 손을 잡으며 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레녹스 : 죄송해요. 헤아려주지 못해서.

 

피가로 : 아니야, 네 탓이 아니야. 화풀이 같은거야.

그래도...그런 태도를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거야.

 

레녹스 : 신경쓰지 마세요. 저야말로 늘 부족해서 죄송해요. 남의 기분을 살피는게 서툴러서...

 

피가로 : 아하하. 알아, 알아. 괜찮아.

 

농담인척 하는 피가로의 대답에 레녹스는 눈을 온화하게 뜨며 작게 웃었다.

 

분명 그는 여행 중에 만났던 콜린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웃었겠지.

누군가의 기도에, 또는 누군가의 아픔에 바쳐진 약속처럼 바람을 맞으며 계속 따라가줄 것이다.

 

레녹스 : 피가로 선생님이나, 현자님. 루틸과 미틸도,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저는 너무 행복해요.

콜린이 남긴 정원이 사라지기 전에 그의 흔적이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소박한 말에 가슴 속이 찡하고 뜨거워졌다.

피가로가 눈썹을 내리고 쓴웃음을 짓는다.

기묘하고 상냥하고 신비한 밤이었다.

 

마법을 써서 물의 다리를 만들거나 분수를 만들고 시간을 들여 이 정원을 사랑했다.

슬프고 쓸쓸하지만 꿈을 꾸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했다.

 

이윽고 기적 같은 시간에도 끝이 찾아왔다.

 

스노우 : 이 물방울 나무에만 가느다란 은색 실이 얹혀져 있어. 아마도 마도구의 스위치일게야.

 

화이트 : 이걸 당기면 이 정원도 사라질게야.

 

쌍둥이의 설명을 듣고 레녹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큰 손바닥을 뻗어 은색 실을 쥔다.

모두 말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양들도. 마법사도.

<거대한 재앙>도.

 

레녹스 : ......

레녹스 : 안녕, 콜린.

 

레녹스는 조용히 작별 인사를 상냥한 비처럼 땅에 떨어뜨리고 은색 실을 당겼다.

순식간에 물방울 나무도, 물방앗간도, 간판도, 작은 상자도, 물로 변해 땅으로 떨어져간다.

 

첨벙 하고 커다란 물보라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렇게 해서 사랑스러운 환상이 사라지듯이 정원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신비한 정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녹스의 발밑에는 낡은 보라색 개구리 모양을 한 장식물이 떨어져있었다.

콜린의 마도구의 정체일 것이다. 보라색 개구리 장식물의 옆에 마나석이 다가가듯이 구르고 있었다.

소중한듯 그것들을 주워든 후 레녹스가 나에게 건넸다.

 

레녹스 : 현자님이 가지고 있어주세요.

 

아키라 : 하지만...

 

레녹스 : 이제 마력은 남아있지 않겠지만 오늘 밤을 추억으로 삼아서.

 

나는 고민한 끝에 레녹스에게 내 손을 포갰다.

보라색 개구리 장식물을 꼭 쥐었다.

 

아키라 : ...알겠어요. 소중히 할게요.

 

안경 너머 레녹스는 미소를 지었다.

맑게 갠 밤하늘 아래에서.

아키라 : (그립다...그 신비한 비의 정원...)

 

보라색 개구리 장식물을 살며시 손끝으로 덧그리며 빗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녹스 : 현자님.

 

레녹스의 목소리다.

들어오세요, 하고 재촉하자 그는 방문을 열었다.

 

레녹스 : 모두와 차를 마시던 참이었어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가지 않겠어요?

 

아키라 : 네! 오늘은 비가 와서 모두 마법관에 있나보네요.

 

레녹스 : 가끔은 이런 날도 좋죠. ...아.

 

책상 위에 놓인 보라색 개구리 장식물을 알아챘는지 레녹스가 입을 열었다.

 

레녹스 : 저도 마침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아키라 : 하하... 비가 오니까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레녹스가 부드럽게 웃음을 짓는다.

 

레녹스 : 좋은 비네